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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가능한 창작 시리즈/[교육과 사회적 실천]

폐쇄된 공간의 재사용

by 지구인_jiguin 2025. 4. 27.

폐쇄된 공간의 재사용

 

폐쇄된 병원의 예술적 재해석, 치유의 공간으로 거듭나다

 

미국 유타대학교 병원에서 진행된 ‘Art Heals’ 프로젝트는 의료 폐기물을 예술로 전환한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이 프로젝트는 COVID-19 팬데믹이라는 시대적 고통을 공유하며, 백신 바이알, 주사기, 병원 장비 등을 벽화의 일부로 사용해 감정적 공감을 이끌어냈습니다. 병원이라는 공간이 본래 지닌 임상적이고 차가운 분위기에서 벗어나, 상실과 회복의 서사가 교차하는 감성적 장소로 전환된 것입니다. 예술가들과 의료진, 환자들이 공동으로 참여한 이 프로젝트는 그 자체로 사회적 치유의 실험이자, 예술이 사람과 공간을 연결하는 강력한 매개체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터키 이스탄불의 메모리얼 병원에서도 예술가 데니즈 사그디치(Deniz Sağdıç)가 주도한 의미 있는 전시가 열렸습니다. 그는 병원에서 수거한 사용된 의료 폐기물—혈압 측정기 파편, 플라스틱 도구, 사용 기구의 조각 등—을 활용해 사람의 얼굴을 형상화한 초상화를 제작했습니다. 이 전시는 ‘Art Heals’라는 주제로 병원 내에 설치되었으며, 예술과 환경, 그리고 인간의 정서적 회복이라는 세 가지 가치를 통합적으로 조명했습니다. 그의 작품은 단순한 시각적 조형을 넘어, 폐기된 물질 안에 담긴 시간과 감정의 잔재를 끌어올리는 행위로써 기능하며, 관람객에게 병원의 기능적 측면을 넘어선 정서적 경험을 제공합니다.

 

이러한 예술적 실험은 폐쇄되거나 일시적으로 기능을 상실한 병원 공간을 다시 해석하게 만듭니다. 병원은 통상적으로 질병과 고통, 생사의 경계에 놓인 곳이지만, 예술적 개입을 통해 감정과 기억을 담아내는 일종의 문화적 풍경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특히 팬데믹 이후 병원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복잡해진 가운데, 이와 같은 프로젝트는 집단적 트라우마와 상실감을 표현하고 위로하는 공간으로 병원을 확장시켰습니다. 예술은 기능을 잃은 의료 공간을 다시 열어젖히고, 그 안에 새로운 정서적 구조를 삽입함으로써 사람들의 기억과 감각을 연결하는 플랫폼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더불어 이러한 사례는 예술이 환경적 지속 가능성과 결합하여 작동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일회용 의료 기기나 폐기된 플라스틱 재료들은 통상 폐기처분의 대상이지만, 예술가는 그것에 미적, 정서적 맥락을 부여하며 감각적으로 재활용합니다. 이때 병원은 단순한 진료의 공간을 넘어, 사회적 가치와 예술적 상상력이 교차하는 복합 문화 공간으로 탈바꿈하게 됩니다. 폐쇄된 병원은 이처럼 예술적 재구성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으며, 시민과 환자, 의료인이 모두 참여하는 치유의 현장으로 자리 잡을 수 있습니다.

 

 

폐쇄된 학교의 문화 공간화, 지역과 예술을 잇는 캠퍼스

미국 뉴욕주 클라버랙(Claverack)에 위치한 한 폐쇄된 학교 건물을 예술 공간으로 재탄생시킨 ‘The Campus’ 프로젝트는, 단순한 공간 재활용을 넘어 지역 예술 생태계를 새롭게 조성한 획기적인 사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여섯 개의 뉴욕 갤러리가 협력하여 78,000평방피트에 달하는 옛 학교를 공동 운영하면서, 폐쇄된 교실과 체육관, 과학 실험실 등 기존의 공간 구조를 거의 그대로 유지한 채 그 안에 예술 전시와 공연, 퍼포먼스를 기획하였습니다. 이로써 공간은 교육 기능을 잃었지만, 문화와 창작의 장소로 재생되었으며, 사람들의 감각을 자극하는 다층적 예술 경험의 장으로 확장되었습니다.

 

특히 ‘The Campus’ 프로젝트는 단순히 예술 전시를 위한 공간 제공에 그치지 않고, 학교라는 공간이 지닌 교육적 상징성과 감정적 기억을 적극 활용하는 방식으로 전시를 구성하였습니다. 예술가들은 이 공간에 직접 체류하며 작품을 구상하고 제작하는 레지던시 형식으로 프로젝트에 참여하였고, 그 과정에서 과거 학생들의 낙서가 남아 있는 책상이나 낡은 게시판, 오래된 실험기구 등을 그대로 작품의 일부로 활용하였습니다. 이는 공간에 대한 존중이자, 폐쇄된 건물이 여전히 살아 있는 기억의 장소라는 점을 드러내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예술은 시간의 흔적을 지우지 않고 되살리는 작업을 통해 과거와 현재, 교육과 창작, 지역성과 세계성을 연결하는 감각적 다리로 기능하게 됩니다.

 

이 프로젝트가 더욱 주목받는 이유는 지역 공동체의 적극적인 참여와 연대에 있습니다. 폐교는 종종 지역 쇠퇴의 상징처럼 여겨지기 마련이지만, ‘The Campus’는 오히려 그 공간을 지역 예술인과 시민이 공유하는 협업의 플랫폼으로 변모시켰습니다. 일부 전시는 지역 학생들과 주민의 기억을 수집해 만든 인터랙티브 아카이브 형식으로 기획되었고, 또 다른 전시는 교실을 작가의 방으로 꾸며 관객이 창작자의 사유과정을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 구성하였습니다. 이러한 접근은 전시장을 단순한 감상의 공간이 아닌, 감정과 기억이 오가는 교류의 장으로 전환시켰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닙니다.

 

더불어 ‘The Campus’ 프로젝트는 예술을 통해 지역 경제와 문화 자산의 회복을 동시에 도모한 전략이기도 합니다. 이 프로젝트는 예술가와 관람객을 지역으로 유입시킴으로써, 주변 상권의 재활성화, 문화관광 수요의 증가, 지역 커뮤니티의 정체성 회복 등의 긍정적 효과를 창출하고 있습니다. 이는 폐쇄된 학교라는 물리적 자산이 단지 과거의 유산에 머무르지 않고, 예술적 개입을 통해 미래를 위한 새로운 기능을 부여받을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 공간이라 하여 곧바로 철거하거나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서사와 사회적 맥락을 회복하는 문화적 상상력이야말로, 오늘날 공공 공간 재활용의 핵심 전략이라 할 수 있습니다.

 

 

폐쇄된 관사의 예술적 활용, 홍콩 'Oil Street Artist Village'

홍콩의 ‘Oil Street Artist Village’는 정부 물자 공급 본부로 사용되던 공공 관사를 예술가들의 창작 공간으로 탈바꿈시킨 대표적인 사례로 손꼽힙니다. 1998년부터 2000년까지 약 2년 동안 운영된 이 공간은, 홍콩 정부가 폐쇄한 관사 건물을 예술가들에게 임시 제공하면서 자생적으로 형성된 예술 공동체였습니다. 약 40여 명의 예술가와 문화 단체들이 이 공간에서 다양한 장르의 창작과 전시, 공연을 진행하며 홍콩 예술계의 새로운 물결을 이끌었습니다. 당시의 관사는 물리적으로 노후한 상태였으나, 바로 그 불완전함이 오히려 실험적 창작의 배경이 되었고, 예술가들은 기존 구조를 해체하거나 보존하는 다양한 방법을 통해 공간과 창작 사이의 상호작용을 탐색했습니다.

 

특히 이곳은 단순한 전시장이 아니라, 창작과 공동체가 실시간으로 맞닿는 일종의 문화 실험실 역할을 했습니다. 예술가들은 주어진 공간을 전시용으로만 쓰지 않고 관객과의 인터랙션을 유도하는 설치 작업, 워크숍, 커뮤니티 프로그램을 통해 시민들과의 접점을 확장하였습니다. 이러한 활동은 기존 예술 공간이 가지는 제한된 역할에서 벗어나, 예술이 지역 사회와 어떻게 유기적으로 호흡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모델이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Oil Street’라는 이름은 단순한 지리적 장소를 넘어, 창작의 자유와 공동체적 감수성을 상징하는 문화 코드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비록 'Oil Street Artist Village'는 2000년 철거되었지만, 그 정신은 이후 홍콩 정부에 의해 ‘Oi!’라는 이름의 새로운 공공 아트 스페이스로 계승되었습니다. ‘Oi!’는 ‘Oil Street Art Space’의 약자로, 같은 장소에 위치한 옛 정부 건물을 리모델링하여 현대적 미술관과 커뮤니티 센터의 기능을 결합한 공간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이 공간에서는 지역 예술가들의 전시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협업 프로젝트, 환경 예술 레지던시, 청소년 대상 교육 프로그램 등 다양한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는 과거 폐쇄된 공간이 물리적으로만 재생된 것이 아니라, 그 안의 창작 정신과 공동체 기반이 제도적으로 재구성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무엇보다 이 프로젝트는 관사의 재사용이 단순한 임시 창작 공간을 넘어서, 도시의 문화 정체성과 미래지향적 예술 인프라로 진화할 수 있음을 실증합니다. 기존의 기능을 상실한 공간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고, 그것을 통해 시민들이 예술을 일상 속에서 경험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이 방식은 홍콩이라는 도시의 복합적 정체성 속에서 매우 의미 있는 전략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Oil Street Artist Village’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그 유산은 여전히 살아 숨 쉬며, 폐쇄된 공간의 예술적 전환 가능성을 세계적으로 증명한 중요한 이정표로 남아 있습니다.

 

 

폐쇄된 공간과 예술의 연결, 사회적 의미의 확장

이러한 사례들은 모두 공통적으로 폐쇄된 공간을 단지 빈 건물이나 기능을 상실한 구조물로 보지 않고, 그 안에 잠재된 기억, 감정, 사회적 관계망을 예술의 언어로 환기시키는 방식으로 접근합니다. 병원은 단순한 치료의 공간에서 나아가 상실과 회복의 정서를 공유하는 치유의 장소로 전환되며, 학교는 지식 전달의 기능을 넘어 공동체가 다시 만나고 교류하는 무대로 변모합니다. 또한 행정기관이었던 관사는 예술가들이 실험과 창작을 펼칠 수 있는 새로운 작업장으로 탈바꿈함으로써, 과거의 권위적, 일방향적 기능에서 벗어나 수평적 소통과 창조적 생산이 이루어지는 공간으로 재해석됩니다. 이처럼 과거의 기능적 정의를 벗어나, 공간의 존재는 다양한 문화적 층위 위에서 새롭게 정의되며, 예술은 그 전환의 주도적 도구로 작용합니다.

 

이러한 전시 기획은 단순한 예술 행위의 범위를 넘어서, 예술가 개인의 창작 환경을 확장하고, 도시의 문화적 다양성과 접근성을 넓히는 실질적 수단이 됩니다. 지역 주민들은 일상에서 마주하던 폐쇄된 공간이 다시 열리고, 예술적 해석을 통해 새로운 경험을 제공받음으로써 공간에 대한 감정적 재연결을 형성하게 됩니다. 이는 도시와 주민 사이의 정서적 단절을 회복하는 계기가 되며, 예술이 어떻게 장소의 정체성을 재조직하고 사회적 응집력을 강화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지점입니다. 전시는 단순한 시각적 감상의 기회를 넘어, 기억과 장소, 감정과 집단 정체성 간의 연결을 회복시키는 통로로 기능하며, 폐쇄되었던 공간은 그 자체로 살아 있는 이야기가 담긴 플랫폼이 됩니다.

 

특히 이러한 문화 기획은 시민의 직접적 참여를 동반하는 경우, 더 깊은 사회적 파급력을 갖게 됩니다. 지역 주민이 창작 과정에 일부 참여하거나, 작품 주제에 관련된 인터뷰나 기억 기록 작업에 함께하는 방식은 예술을 더욱 확장된 사회적 실천으로 만듭니다. 이러한 접근은 예술가와 주민, 행정이 상호 협력하는 삼각 구도를 형성하면서, 자원 공유, 창작 공간 지원, 지역 문화자산 보존이라는 정책적 가치도 함께 실현됩니다. 이로써 예술은 일시적 프로젝트가 아닌, 지속 가능한 도시재생 전략의 일환이 될 수 있으며, 이는 사회적 연결성과 문화의 민주화를 촉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됩니다.

 

결국 폐쇄된 공간의 예술적 활용은 예술을 위한 장소 확보의 차원을 넘어서, 도시가 무엇을 기억하고, 어떤 미래를 꿈꿀 수 있는지에 대한 하나의 선언이기도 합니다. 그 안에 축적된 시간과 이야기를 예술로 호출함으로써, 폐쇄된 병원, 학교, 관사 등은 그저 기능을 다한 장소가 아닙니다. 이들은 예술을 통해 기억의 장소이자 감정의 장소로 새롭게 태어날 수 있습니다. 특히 공공성과 지역성과 창작성이 어우러지는 방식으로 기획된 전시는, 단지 시각적 감상의 영역을 넘어 시민들의 삶과 연결되는 새로운 경험을 제공합니다. 앞으로도 이처럼 과거의 흔적이 서린 공간들이 예술과 공동체를 연결하는 실험장이자, 지속 가능한 도시 문화의 플랫폼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행정, 예술가, 지역 사회가 함께 고민해야 할 시점입니다.